개요
바로크 양식의 건축미와 그 안에 소장된 종교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자 하는 예술 애호가나 역사 및 문화 탐방에 관심 있는 여행객들이 주로 방문한다. 특히 팔마 일 베키오와 같은 거장들의 회화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이곳에서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재건된 웅장한 바로크 양식의 외관과 내부 공간을 직접 둘러볼 수 있으며, 제단과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여러 종교 회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성당 내부 바닥 일부는 유리로 되어 있어 그 아래의 고대 묘지 유적을 관찰하는 특별한 경험도 가능하다.
일부 방문객은 교회가 주로 미사 시간에만 개방되고 상시 관리인이 없어 방문에 제약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접근 방법
🚗 자가용 이용
- 비첸차 시내 중심부에 위치하나, 주변이 귀족 저택과 좁은 도보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어 차량 접근 및 주차 공간 확보가 용이하지 않을 수 있다. 인근 공영 주차장 정보를 사전에 확인하는 것이 좋다.
🚶 도보 이용
- 비첸차 역사 지구 내 다른 명소들과 가까워 도보로 함께 둘러보기에 적합하다. 팔라초 레오니 몬타나리 미술관, 산타 코로나 성당 등이 인근에 있다.
주요 특징
성당 왼쪽 트랜셉트에 위치한 이 작품은 팔마 일 베키오의 원숙미가 돋보이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성 게오르기우스와 성 루치아, 음악을 연주하는 천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로마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받아 재건되었다. 웅장한 파사드와 높은 돔, 거대한 아치로 구성된 내부는 밝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 제단에 있는 귀중한 성궤는 도메니코 안젤리의 작품이며, 문에 그려진 세 개의 목판화는 조반니 도메니코 티에폴로의 작품이다. 중앙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영향이 엿보이는 섬세한 표현이 특징이다.
추천 포토 스팟
성당 정면 파사드
웅장한 바로크 양식의 석조 파사드 전체를 담을 수 있다. 다섯 개의 조각상과 코린트식 기둥이 인상적이다.
내부 중앙 돔 아래
거대한 아치와 함께 높이 솟은 돔의 장엄함을 촬영할 수 있다. 밝은 내부와 어우러져 공간감이 느껴진다.
팔마 일 베키오 제단화 앞
성당의 주요 예술 작품인 '성모자와 성인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길 수 있다. 작품의 섬세한 색채와 구도를 담아보자.
축제 및 이벤트
방문 팁
미사 시간에 방문하면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인근에 팔라초 레오니 몬타나리 미술관과 산타 코로나 성당이 위치해 도보로 함께 방문할 수 있다.
성당 내부 바닥 일부는 유리로 되어 있어 그 아래의 고대 묘지 유적을 관찰할 수 있다.
역사적 배경
최초 기록 등장
교황 우르바노 3세의 교서에서 성 스테파노에게 헌정된 예배당이 처음으로 언급된다. 당시 비첸차의 7개 도시 예배당 중 하나였다.
중요성 증대
대성당 다음으로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예배당으로 부상하며 측면 예배당과 제단들이 증축되었다.
첫 번째 재건축
노후된 교회가 완전히 재건축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이전의 예술 작품들이 소실되었다.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
테아티니 수도회 주도로 현재의 바로크 양식 성당으로 재건축이 시작되었다. 카를로 보렐라가 초기 건축을 담당했으며, 로마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공사는 40년 이상 지속되어 1740년에 완공되었다.
프랑스군에 의한 약탈
나폴레옹 군대가 비첸차를 점령하면서 성당의 귀중한 은제 성상과 성유물함, 제단 장식 등을 약탈당했다.
돔 개축
기존의 반구형 돔이 철거되고 비토리오 바리첼라의 설계로 현재의 높은 원통형 구조 위의 돔이 세워져 도시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 되었다.
여담
이 성당이 자리한 곳은 고대부터 성 스테파노 순교자에 대한 숭배가 이루어졌던 장소로, 비첸차 초기 기독교 시절부터 예배 공간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18세기 재건축 당시, 로마의 산탄드레아 델라 발레 성당에서 영감을 받은 순수한 로마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는 비첸차에서는 독특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한때 테아티니 수도회가 이 성당을 관리하며 자신들의 창설자인 성 가에타노 티에네를 기리기 위해 성당 이름을 바꾸려 했으나, 결국 성 스테파노라는 원래 이름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시대 도시 교회 구조 개편 과정에서 폐쇄될 뻔한 위기를 겪었으나, 시민들의 청원으로 유지되었으며 오히려 다른 여러 작은 본당들을 통합하는 중심 본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