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고대 로마의 웅장했던 공공 건축물의 잔재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과 건축 기술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역사 애호가 및 고대 문명 탐구자들이 주로 방문한다. 특히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 로마 제국의 위용을 느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의미 있는 장소이다.
남아있는 거대한 기둥들과 바닥 유적을 통해 과거 최대 규모였던 바실리카의 장엄함을 상상해 볼 수 있으며, 트라야누스 포룸의 중심 건물로서 주변 유적과의 연관성을 파악하며 고대 로마의 도시 계획을 엿볼 수 있다.
상당 부분이 유실되어 남아있는 유적만으로는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 어려워, 방문 전 관련 자료를 통해 사전 지식을 갖추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있다. 일부 안내판에는 복원도가 제시되어 이해를 돕는다.
접근 방법
🚇 지하철 이용
- 로마 지하철 B선 콜로세오(Colosseo) 역에서 하차하여 포로 로마노 방면으로 도보 약 10-15분.
- 로마 지하철 B선 카부르(Cavour) 역에서 하차하여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Via dei Fori Imperiali) 방면으로 도보 약 10분.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 도로변에 위치하여 찾기 쉽다.
🚌 버스 이용
-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Via dei Fori Imperiali)를 경유하는 다수의 시내버스 노선 이용 가능. 'Fori Imperiali' 또는 'Piazza Venezia' 인근 정류장 하차.
주요 특징
과거 웅장했던 바실리카의 일부인 회색 화강암 코린트식 기둥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이 기둥들을 통해 당시 로마 건축의 규모와 정교함을 엿볼 수 있다.
운영시간: 포룸 개방 시간 내
바실리카 울피아는 트라야누스 포룸에서 신전과 주 광장을 구분하는 역할을 했으며, 포룸 전체의 중심적인 공공 건물이었다. 주변의 트라야누스 시장, 트라야누스 원주 등과 함께 고대 로마의 도시 생활을 상상하며 탐방할 수 있다.
운영시간: 포룸 개방 시간 내
기독교 바실리카와 달리 종교적 기능이 없었던 이곳은 사법 재판, 상거래, 황제의 공무 수행 등 다양한 시민 활동의 중심지였다. 남아있는 유적을 통해 당시의 활기 넘치는 공공 생활의 현장을 그려볼 수 있다.
운영시간: 포룸 개방 시간 내
추천 포토 스팟
남아있는 화강암 기둥 열
줄지어 서 있는 고대 화강암 기둥들을 배경으로 촬영하면 바실리카의 웅장함을 담을 수 있다.
트라야누스 원주를 배경으로 한 바실리카 울피아
바실리카 울피아 뒤편으로 보이는 트라야누스 원주와 함께 전체적인 포룸의 모습을 프레임에 담을 수 있다.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에서 바라본 전경
대로변에서 바실리카 울피아와 트라야누스 포룸 전체 유적을 넓게 조망하며 촬영할 수 있다.
축제 및 이벤트
방문 팁
트라야누스 시장 유적과 박물관을 함께 방문하면 당시 로마의 상업 활동과 건축 기술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야간에는 유적지에 조명이 켜져 낮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언급이 있다.
포로 로마노 및 팔라티노 언덕 통합 입장권으로 함께 둘러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역사적 배경
건설
트라야누스 황제의 명으로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가 설계하여 건설했다. 다키아 전쟁 승리를 기념하여 조성된 트라야누스 포룸의 일부이다.
완공 및 개장
로마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바실리카로, 사법, 행정, 상업 및 황제의 공식 업무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주요 공공건물로 기능
로마의 정치 생활 중심지가 로만 포룸에서 트라야누스 포룸으로 옮겨오는 데 기여했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가 건설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바실리카로 여겨졌다.
파괴 및 자재 유용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점차 파괴되고 건축 자재로 유용되었다. 일부 대리석 기둥은 성 베드로 대성당 등으로 옮겨졌다.
최초 발굴
나폴레옹 점령 하의 프랑스 정부에 의해 부지 위의 두 수도원이 철거된 후 최초 발굴이 시작되었다.
교황 주도 발굴 재개
교황 비오 7세가 망명에서 돌아와 발굴을 재개했으며, 화강암 기둥들을 재조립하고 발굴 구역을 정비했다.
추가 발굴 및 연구
무솔리니 정권 시절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 건설로 일부 유적이 도로 밑에 묻혔으나, 지속적인 연구와 발굴이 이루어졌다.
아나스틸로시스 방식 복원 시작
원래의 건축 부재를 사용하여 유적을 복원하는 아나스틸로시스 방식으로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자금은 알리셰르 우스마노프가 기증했다.
여담
바실리카 울피아라는 이름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가문명인 '울피우스(Ulpius)'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의 다주식 홀(hypostyle hall)과 유사한 건축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북동쪽 앱스(반원형 공간)가 과거 로만 포룸에 있던 '아트리움 리베르타티스(Atrium Libertatis)'의 기능을 이어받아 노예 해방과 관련된 법적 절차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며, 이곳에 자유의 여신 리베르타스(Libertas)의 성소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입구 위쪽 프리즈에는 다키아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한 로마 군단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후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새로운 기독교 교회 건축의 기본 평면으로 이 바실리카 울피아의 구조를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굴 초기, 귀중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 포장 유적은 관광객들에 의해 점차 사라졌다는 안타까운 기록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