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개요
멜피 성은 중세 역사와 고고학 유물에 깊은 관심이 있는 역사 애호가 및 학술 탐방객들이 주로 방문한다. 이들은 노르만부터 앙주 왕가에 이르는 성의 다층적 역사와 건축을 탐구하고,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소장품을 통해 지역사를 심도 있게 이해하고자 한다.
방문객들은 성 내부를 거닐며 다양한 시대의 건축 양식을 관찰할 수 있고,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 라폴라 석관을 비롯한 중요 유물들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성벽과 탑에서는 주변 경관을 조망하며 과거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을 체감할 수 있다.
일부 방문객들은 지진 복원 공사로 인해 성 내부가 현대적으로 개조되어 고성 특유의 분위기가 다소 약화되었다고 평가하며, 성의 일부 구역이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점에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접근 방법
🚗 자가용 이용
- 성 근처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하며, 인근에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일부 리뷰에서는 지정된 주차장이 아닌, 주변에 주차해야 하는 경우도 언급된다.
🚶 도보
- 멜피 시내 중심부에서 도보로 접근 가능하며, 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다소 경사가 있을 수 있다.
일부 구간은 포장 상태가 고르지 않을 수 있다.
주요 특징
성 내부에 위치하며 선사시대부터 로마, 중세 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고고학적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라폴라 석관(Sarcophagus of Rapolla)**과 같은 중요 유물을 통해 당시의 예술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11세기 노르만 시대에 건축을 시작하여 호엔슈타우펜, 앙주 가문을 거치며 증개축된 성의 다층적인 건축 양식을 탐험할 수 있다. 7개의 직사각형 탑과 3개의 오각형 탑 등 총 10개의 탑과 견고한 성벽을 따라 걸으며 중세 요새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데리코 2세가 1231년 시칠리아 왕국의 법전인 **멜피 헌법(Constitutions of Melfi)**을 반포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옥좌의 방' 또는 '법령의 방(Hall of the Bowl)'으로 알려진 공간 등에서 중세 법제사와 페데리코 2세의 업적을 되새겨볼 수 있다.
추천 포토 스팟
성 외부 전경 및 입구 다리
웅장한 성의 전체적인 모습과 오래된 다리를 배경으로 중세 분위기를 담을 수 있다. 특히 한때 도개교였던 입구 다리는 독특한 사진을 연출한다.
성 내부 안뜰 및 탑
잘 보존된 안뜰과 다양한 형태의 탑들은 성의 역사적 깊이를 보여주는 좋은 피사체이다. 탑에서 내려다보는 멜피 시내 전경도 촬영 포인트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내 주요 유물 (예: 라폴라 석관)
정교하게 조각된 라폴라 석관과 같은 박물관의 주요 유물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사진 소재가 된다. (단, 촬영 가능 여부 및 플래시 사용 규정 확인 필요)
축제 및 이벤트
방문 팁
입장료가 비싸지 않아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다. (성인 기준 약 4유로)
성 내부에 있는 국립 고고학 박물관은 다양한 시대의 귀중한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으므로 놓치지 말고 관람하는 것이 좋다.
전체 관람에는 약 1~2시간 정도 소요되므로 시간 계획에 참고한다.
성 내부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유모차나 휠체어 사용자도 비교적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으며, 각 층마다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다.
어린이 방문객을 위한 놀이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언급이 있다.
반려견 동반 입장이 가능하다는 정보가 있다. (목줄 착용 등 규정 확인 필요)
멜피 성, 베노사 고고학 지역, 아라곤 성을 함께 방문할 수 있는 **통합 입장권(약 7유로, 3일 유효)**이 있어 여러 곳을 둘러볼 계획이라면 유용하다.
성 내부에서는 휴대전화 수신이 원활하지 않고 Wi-Fi가 제공되지 않아, 박물관에서 제공하는 무료 오디오 가이드 이용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역사적 배경
노르만인에 의한 건설 시작
캄파니아와 풀리아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에 노르만인들이 외부 공격 방어 및 동맹군 피난처로 건설을 시작했다. 로베르토 기스카르 공작 시기 중요한 거점이었다.
교황령 공의회 개최지
멜피는 풀리아 백작령의 중심지로, 이 기간 동안 5명의 교황 주재로 총 5차례의 공의회가 성에서 개최되었다. 1059년 니콜라오 2세 교황은 이곳에서 멜피 협약을 통해 노르만 정복을 공식 인정하고 로베르토 기스카르를 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와 페데리코 2세
페데리코 2세 황제는 멜피 성을 중요시하여 여러 차례 개조를 명했다. 1231년, 그는 이곳에서 시칠리아 왕국의 법전인 '멜피 헌법(Liber Augustalis)'을 반포했다. 성은 세금 징수처 및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
앙주 왕가 및 후계자 시대
앙주 가문 통치 하에 대대적인 보수 및 확장이 이루어졌다. 1284년에는 샤를 2세의 아내인 헝가리의 마리아가 공식 거주지로 사용했다.
아라곤 왕가 및 귀족 가문 소유
아라곤 정부 하에서 변경되었으며, 이후 아치아이올리, 마르차노, 카라치올로, 그리고 1950년까지 도리아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국립 고고학 박물관 개관
성에 멜페세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 개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담
멜피 성에서는 1059년부터 1137년 사이에 각기 다른 다섯 명의 교황 주재로 총 다섯 차례의 중요한 교회 공의회가 열렸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데리코 2세는 1231년 이곳에서 중세 시칠리아 왕국의 중요한 법전인 '멜피 헌법(Liber Augustalis)'을 공포했다.
성은 1851년과 1930년에 발생한 두 차례의 강력한 지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다른 멜피 기념물들이 심하게 손상된 것과 달리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거 페데리코 2세 통치 시절, 성은 바실리카타 지역에서 징수한 세금을 보관하는 창고이자 포로들을 수감하는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
앙주 왕가의 샤를 2세의 아내였던 헝가리의 마리아가 1284년부터 이 성을 공식 거주지로 삼았다는 사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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