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개요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파묻혔던 고대 로마 도시의 잘 보존된 유적을 직접 탐험하고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은 역사 애호가나 고고학에 관심 있는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다. 폼페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보존 상태가 뛰어나고 목조 건축물과 다층 구조의 건물까지 확인할 수 있어 깊이 있는 역사 체험을 원하는 방문객에게 적합하다.
방문객들은 화산재와 진흙 속에 묻혔던 거리, 주택, 공중목욕탕, 상점 등을 거닐며 고대 로마인들의 삶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특히 선명한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 탄화된 목재 가구 등은 당시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해변가에서는 피난민들의 유골을 통해 비극적인 역사의 순간을 마주할 수도 있다.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이 부정확하거나 앱 로딩 문제, 안내 지도와 실제 유적지 번호 불일치 등으로 관람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일부 유적은 보수 공사로 접근이 제한될 수 있다.
접근 방법
🚇 치르쿰베수비아나 기차 (Circumvesuviana)
- 나폴리 중앙역(Napoli Garibaldi) 또는 소렌토(Sorrento)에서 탑승.
- '에르콜라노 스카비(Ercolano Scavi)' 역에서 하차.
- 역에서 유적지 입구까지 도보 약 8-10분 소요 (약 800m 직진).
나폴리-소렌토 노선 운행. 배차 간격은 약 30분이나, 지연이 잦을 수 있다.
🚗 자가용
- A3 고속도로(Napoli-Salerno) 이용, 에르콜라노(Ercolano) 출구.
- 유적지 근처에 유료 주차장이 있으나 공간이 협소할 수 있다.
유적지 주변 도로는 혼잡할 수 있으며, 주차 공간 찾기가 어려울 수 있다.
🚌 버스
- 나폴리에서 출발하는 일부 시외버스 노선이 에르콜라노를 경유한다.
버스 노선 및 시간표는 현지에서 확인하는 것이 좋다.
주요 특징
헤르쿨라네움은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화산재와 뜨거운 진흙(화쇄류)으로 순식간에 덮여 건물의 상층부와 목재 구조물까지 놀랍도록 잘 보존되었다. 방문객들은 고대 로마의 주택, 상점, 목욕탕 등을 거닐며 생생한 프레스코화와 바닥 모자이크를 감상할 수 있다.
과거 항구였던 해변가 보트하우스(Fornici)에서는 화산 폭발을 피해 배를 기다리다 희생된 주민 약 300명의 유골을 볼 수 있어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과 비극을 느낄 수 있다. 최근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된 고대 해변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남탕과 여탕으로 구분된 포룸 목욕탕(Terme del Foro)은 탈의실(Apodyterium), 온탕(Tepidarium), 열탕(Calidarium) 등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특히 바닥의 모자이크와 벽면 장식은 당시 로마인들의 목욕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추천 포토 스팟
넵투누스와 암피트리테의 집 (Casa di Nettuno e Anfitrite) 모자이크
집 안뜰 벽면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넵투누스(포세이돈)와 그의 아내 암피트리테의 생생한 유리 모자이크는 헤르쿨라네움의 상징적인 이미지 중 하나이다.
잘 보존된 프레스코화 (예: 아우구스탈레움 Collegio degli Augustali)
아우구스탈레움 내부를 비롯한 여러 건물에서 발견되는 선명한 색채의 프레스코 벽화는 신화 속 장면이나 당시 생활상을 담고 있어 인기 있는 촬영 배경이 된다.
고대 해변과 보트하우스 (Antica Spiaggia e Fornici)
최근 복원 공개된 고대 해변과 희생자들의 유골이 발견된 보트하우스는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담을 수 있는 장소이다. 멀리 보이는 베수비오 산과 함께 촬영하기도 한다.
축제 및 이벤트
방문 팁
폼페이보다 덜 붐비지만, 오전 일찍(개장 시간 08:30) 방문하면 더욱 한적하게 관람할 수 있다.
오디오 가이드보다 입구에서 현지 가이드 투어(유료)를 이용하면 유적 이해에 더 도움이 된다는 방문객 후기가 많다.
유적지 내부에 식수대가 없으므로, 물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이 좋다. 입구 매표소 근처 자판기에서 구매할 수 있다.
지면이 고르지 않고 고대 돌길과 계단이 많으므로 편안하고 접지력 좋은 신발 착용은 필수이다.
큰 배낭은 입구의 무료 사물함에 보관해야 하며, 사물함 크기가 제한적이므로 짐을 최소화하는 것이 편리하다.
일부 유적(예: 카사 델라 젬마)은 오후 1시 30분에 조기 마감될 수 있으므로, 방문 계획 시 참고하는 것이 좋다.
입장권은 현장 구매도 가능하지만, 혼잡을 피하려면 공식 웹사이트에서 온라인으로 사전 예매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치르쿰베수비아나 기차 '에르콜라노 스카비(Ercolano Scavi)' 역에서 하차 후, 역 광장에서 오른쪽 대각선 방향으로 나와 약 800m(도보 10분) 직진하면 유적지 입구에 도착한다.
역사적 배경
도시 건설 추정
전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가 세웠다고 전해지나, 실제로는 오스키인 또는 에트루리아인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의 영향력 확대
그리스인들에게 정복되어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로마 공화정 편입
동맹시 전쟁 이후 로마에 정복되어 무니키피움(자치 도시)이 되었으며,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번성했다.
대지진 발생
폼페이와 마찬가지로 대지진으로 인해 도시의 많은 건물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
베수비오 화산의 대규모 폭발로 인해 발생한 화쇄류(뜨거운 화산 가스와 화산재의 흐름)와 진흙더미에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매몰되었다.
유적 우연히 발견
지역 농부가 우물을 파던 중 고대 극장의 일부로 추정되는 대리석 조각들을 발견했다.
본격적인 발굴 시작
나폴리 왕국의 카를로스 3세(샤를 드 부르봉)의 후원으로 스페인 군사 기술자 로케 데 알쿠비에레의 지휘 아래 체계적인 탐사와 발굴이 시작되었다.
빌라 데이 파피리 발굴
수많은 파피루스 두루마리와 조각상들이 발견된 호화로운 저택 '빌라 데이 파피리'가 터널식 발굴을 통해 탐사되었다.
아메데오 마이우리 주도 대규모 발굴
고고학자 아메데오 마이우리의 주도로 현대적인 방식의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져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지의 대부분이 드러났다.
해변가 피난민 유골 발견
과거 해안선이었던 지역의 보트하우스에서 화산 폭발 당시 피난하려다 숨진 약 300구의 유골이 발견되어 당시의 비극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폼페이, 토레 아눈치아타 유적과 함께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그리고 토레 아눈치아타의 고고 유적 지역'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헤르쿨라네움 보존 프로젝트 시작
패커드 인문학 연구소(Packard Humanities Institute)와의 협력으로 유적 보존 및 연구를 위한 '헤르쿨라네움 보존 프로젝트(Herculaneum Conservation Project)'가 시작되었다.
독립 고고학 공원 승격
폼페이로부터 독립하여 자체 관리 및 운영되는 '헤르쿨라네움 고고학 공원(Parco Archeologico di Ercolano)'으로 공식 출범했다.
고대 해변 일반 공개
수년간의 복원 작업을 거쳐 고대 해변(Antica Spiaggia)이 일반 방문객에게 공개되었다.
여담
폼페이는 화산재와 화산탄(라필리)으로 덮인 반면, 헤르쿨라네움은 뜨거운 화산 가스와 진흙이 섞인 화쇄류에 의해 매몰되어 건물의 상층부와 목재 같은 유기물까지 탄화된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발굴된 유물 대부분은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헤르쿨라네움 현장에는 일부 복제품과 현장 박물관(안티콰리움)에 일부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얘기가 있다.
한때 도시 인구가 화산 폭발 직전 모두 피난했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1980년대 해변가에서 수백 구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배를 기다리다 참사를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언급이 있다.
유적을 덮고 있는 굳어진 화산 물질층은 '파파몬테(pappamonte)'라고 불리며, 이는 응회암과 유사하지만 더 부드러운 암석으로 알려져 있다.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두루마리들은 대부분 그리스 철학 내용을 담고 있으며, 탄화되어 해독이 매우 어렵지만 현대 기술로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고대 헤르쿨라네움의 전체 면적 약 20헥타르 중 현재까지 약 4.5헥타르만 발굴되었으며, 나머지 부분은 현대 도시 에르콜라노 아래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 있다.
폼페이 유적보다 방문객 수가 적어 비교적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는 평이 있다.
유적지 내 카사 데이 체르비(사슴의 집)에서 발견된 탄화된 빵 중에는 주인의 이름(Celer)이 찍힌 것도 있어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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